(4) AI 시대에 다시 시니어가 되는 법 — 종이에서 시작한 일은 컴퓨터로 옮기기 어렵다

1980년대 영화에 이런 장면이 있다. 컴퓨터가 막 사무실에 들어오던 시절. 평생 종이로 일하던 기자가 컴퓨터 화면에 뜬 글자를 손가락으로 문질러서 지우려 한다. 안 지워지니까 화면을 툭툭 친다. 몇 시간째 씨름한다.

지금 보면 웃기다. “백스페이스 한 번이면 1초인데?”

근데 그게 그 시대엔 안 보였다. 종이에서 평생 일한 사람한테는, 화면 속 글자도 종이처럼 보였으니까. 지우개로 지우고, 손으로 문지르고. 도구는 바뀌었는데 일을 시작하는 출발점이 안 바뀐 거다.

10년 뒤, 우리는 지금을 똑같이 본다. “AI한테 안 물어보고 그걸 직접 다 했다고?”


종이에서 시작한 일은, 컴퓨터로 못 옮긴다

이게 핵심이다. 컴퓨터 위에서 시작한 일은 컴퓨터에서 아주 편하다. 고치고, 복사하고, 옮기고, 되돌리고. 1초면 된다.

그런데 종이에서 시작한 일은, 다시 종이로 가져가는 데 한참 걸린다. 손으로 쓴 걸 다시 타이핑하고, 종이 지우개로 지우고, 또 옮겨 적고. 출발점이 종이였으니까.

지난 3편에서 5-10년차가 AI 시대에 도태되는 패턴을 봤다. 그 글이 불편했다면, 이유는 하나다. 일을 여전히 “종이에서” 시작하고 있어서다.

AI를 옆에 두긴 했는데, 일은 옛날 방식으로 시작한다. 다 해놓고 나서 “이거 AI로 다듬어볼까” 한다. 그게 종이에서 시작해서 컴퓨터로 옮기는 거다. 느리고, 고통스럽고, 본인만 그걸 모른다.

다시 시니어가 되는 법은 거창하지 않다. 출발점을 옮기면 된다. 딱 세 가지다.


하나. 일이 들어오면, AI 창부터 연다

딱 이거 하나만 바꿔도 된다.

예전엔 일이 들어오면 “어떻게 하지” 하고 혼자 끙끙대거나, 옆 사람한테 물었다. 지금은 일이 들어오는 그 순간 Claude나 GPT 창을 먼저 연다. “이거 어떻게 접근하면 좋을까” 하고 던진다. 5초 만에 길이 5개 나온다.

종이에서 시작하지 말고 컴퓨터에서 시작하라는 것. 그게 전부다.

이 작은 차이가 1년이면 어마어마해진다. 매번 AI 창부터 여는 사람과, 다 해놓고 나서야 AI를 켜는 사람. 1년 뒤 둘의 속도는 비교가 안 된다.

오늘 할 것: 내일 아침 첫 업무가 들어오면, 손대기 전에 AI 창부터 연다. 딱 하루만 해본다.


둘. 내가 잘하던 걸, AI가 얼마나 하는지 직접 본다

5-10년차의 진짜 무기는 “이런 일은 이렇게 푸는 거야”라는 감(感)이었다. 10년 쌓은 패턴. 후배는 모르고 나만 아는 것.

불편한 진실: 그 감의 상당 부분을, AI가 0.5초 만에 내놓는다.

이걸 외면하면 도태된다. 인정하면 길이 보인다. 내가 자신 있던 일을 AI한테 똑같이 시켜본다. 어디까지 따라오는지, 어디서 막히는지 직접 본다.

그러면 보인다. AI가 못 하는 영역. 진짜 판단이 필요한 것, 사람 사이를 조율하는 것, “이게 왜 중요한지” 설명하는 것. 거기가 앞으로 내 자리다. AI가 0.5초에 하는 일에 매달리지 말고, AI가 못 하는 쪽으로 옮겨간다.

오늘 할 것: 내가 제일 자신 있는 업무 하나를 AI한테 시켜본다. 어디서 막히는지 본다. 거기가 내 영역이다.


셋. AI 잘 쓰는 후배한테, 그냥 물어본다

제일 어려운 게 이거다. 자존심.

후배가 AI로 30분 만에 끝낸 걸 보면 속이 불편하다. 근데 어떻게 했는지 묻기는 싫다. 그래서 안 묻는다. 1년을 안 묻는다. 그 1년이 격차를 만든다.

AI 잘 쓰는 후배는 매주 새로운 방법을 발견한다. 그걸 그냥 물어보면 된다. “그거 어떻게 한 거야? 나도 알려줘.” 이 한마디가 1년에 수백 개의 노하우를 가져다준다.

대신 나는 후배가 모르는 걸 준다.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, 이 일이 왜 중요한지, 누구를 설득해야 하는지. 그게 서로 가르치는 관계다. 후배는 도구를, 나는 맥락을.

오늘 할 것: 팀에서 AI 제일 잘 쓰는 사람한테 점심 한 번 산다. “요즘 그거 어떻게 쓰는지 알려줘.”


결국, 출발점 하나다

종이에서 시작한 일은 컴퓨터로 옮기기 어렵다. 컴퓨터에서 시작한 일은 컴퓨터에서 편하다. 5-10년차가 도태되는 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, 아직 종이에서 시작하고 있어서다.

세 가지가 다 어렵게 들리면, 딱 첫 번째 하나만 한다. 일이 들어오면 AI 창부터 열기.

그 작은 습관 하나가 출발점을 옮긴다. 그리고 출발점이 컴퓨터로 옮겨가는 순간, 나머지는 따라온다. 화면 속 글자를 손으로 문지르던 그 기자도, 백스페이스 한 번을 배운 순간 다시는 종이로 안 돌아갔으니까.

→ 다음 글에서는 AI 풀어준 회사에서 새로 생기는 일자리 — 5-10년차가 옮겨갈 수 있는 자리들을 다룬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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